[미국교환학생 국내대학 합격수기]
다가오는 기회를 놓치지 않는 법을 배우다(1)
2009년도 미국교환학생 김희래
여느 때와 다름 없이 학교 수업을 마치고 집에 돌아와 간식을 먹고 있을 때였다. 엄마가 갑자기 나에게 꺼낸 말이 아직도 귀에 생생하다.
“희래야, 너 미국 한번 가보지 않을래?”
유학이라는 나에게는 너무나도 멀고 생소한 단어가 귀에 들어왔을 때, 나는 아무 생각이 없어졌던 것 기억이 난다. 그때의 나는 아직 중학교 3학년이었고, 먼 나라에서 공부하기보다는 엄마 아빠가 있는 집에서 하루하루 밥을 먹고 학교를 다니는데 너무나 익숙해져 있었기 때문이다. 어디에선가 엄마가 들어온 미국 교환학생 프로그램을, 나는 그렇게 만났다.
밑에 동생 두 명이 있는 장녀로서, 사실 부모님과 떨어져 지내는 것에 대한 두려움은 별로 없던 나였다. 초등학생 시절 여름방학 캠프에서 부모님 도움 없이 혼자 지내는 것도 체험해보고, 또 맏딸이라는 막연한 책임감 때문인지 다른 아이들에 비해 부모님께 의존하는 성격은 아니었다. 그렇기 때문에, 미국 교환학생이라는 것도 크고 무서운 일로 다가오지는 않았다. 여름방학 캠프 정도의 크기로 인식되었던 것 같다.
어릴 때부터 영어에 자신 있었던 나였다. 중학생 때 친 TEPS는 700점 중후반대를 넘나들었고, 이 정도면 중학생 치고 양호한 영어 실력이라는 말을 주변에서 들었다. 미국 교환학생을 어렵지 않게 가기로 결정한 이유 중에 하나도 이 때문이리라. 영어에 대한 두려움이 없었기 때문에, 어떻게든 내 의견을 피력하고 먹고 살 수는 있을 것이라는 자신감이 있었다.
아이러니하게도, 날 미국 교환학생 프로그램에 참가하게 만든 이유 중에 하나도 이 영어 실력 때문이었다. 한국에서 태어나 한국에서만 영어 공부를 해온, 소위 ‘토종’ 학생으로서의 영어 실력은 우수한 편이었지만, 확실히 유학 경험이 있는 또래 아이들에 비해선 월등히 뛰어날 수 없다는 것을 나 자신도 알고 있었다. 단기간이지만 미국에 다녀옴으로써, 나는 내 장점인 영어 실력을 극대화 하고 싶었으며, 나의 발전 가능성을 시험해보고 싶었다.
어릴 때부터 가족끼리 여행을 많이 가곤 했는데, 나는 항상 여행의 순간 순간이 행복했다. 새로운 나라의 거리와 그 공기를 느끼며, 이국적인 문화를 체험하는 것은 항상 신선했다. 미국이라는 내가 가보지 못한 거대한 세계에 엄청난 호기심을 가졌던 것 같다. 더 넓은 세상을 보고, 세상을 바라보는 나의 시야를 확대하고 싶었다.
되돌아보면, 차분하고 조용한 편이었던 중3짜리 치고는 꽤 대담한 결정이었다. 미국 교환학생 프로그램은 나에게 다가오는 첫 번째 큰 터닝포인트이자 기회였고, 조용했던 그 여중생은 그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미국 교환학생 프로그램을 준비하는 과정이 새록새록 떠오른다. 나는 다른 친구들에 비해 비교적 일찍 호스트 패밀리 배정을 받았다. 펜실베이니아 주의 끝자락인 Point Marion이라는 동네에 살고 있는 백인 가정이었다. 이들이 제일 먼저 나를 ‘선택’해 주었다는 사실에 많이 기뻤던 기억이 난다. 시간을 맞추어 Skype로 서로의 얼굴을 확인했고, 출국 하기 전까지 바쁘게 서로 메일을 주고 받았다. 무엇을 좋아하는지, 내 침구는 어떤 패턴이 좋은지, 무슨 색을 좋아하는지, 매우 소소하고 개인적인 질문을 받으면서 나는 호스트 패밀리와 점점 더 가까워질 수 있었다.
미국으로 떠나는 날, 나는 정말 담담하고 차분했다. 솔직히 지금은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는 사실이 아직까지 놀랍다. 혼자 타보는 첫 비행기였고, 처음 가보는 미국이었다. 놀랄 만큼 담담하고 차분하게, 나는 터닝포인트를 맞이했다.
미국 땅을 밟고 게이트를 나오자마자, 나를 기다리고 있는 우리 호스트 가족을 만날 수 있었다. 원체 마음이 여렸던 호스트 엄마 Robin은 날 보자마자 감동에 젖어 눈에 눈물이 고였던 것 같다. 나보다 한 살이 더 많던 호스트 언니 Becca는 반갑다고 말하며 나를 꽉 안아줬다. Bill의 이름의 호스트 아빠는 아직까지 내가 어색했는지, 악수를 청하고 우리는 근처 멕시칸 음식점에서 밥을 먹고 집으로 갔다.
Point Marion은 미국 펜실베이니아 주의 끝자락에 위치한 시골 동네였다. 아빠 Bill은 트럭으로 빵을 배달하는 일을 하고 있었고, 엄마Robin은 자택근무로 종합 병원의 안내 전화를 맡는 일을 했다. 경제적으로 부유하진 않지만, 삶을 즐길 줄 아는 사람들이었다. 내가 그들에게 정말 감사했던 점은 나를 진짜 가족의 일부로 받아주어 경제적으로 내게 부담을 주지 않았다는 것이다. 나중에 다른 친구에게서 외식을 하고 난 후 자신은 호스트 패밀리와는 따로 돈을 낸다는 말을 듣고 놀랐던 기억이 난다. 나를 진정한 가족으로 받아들여 무엇을 하던 함께 나누어 주던 우리 호스트 가족의 아량에, 시간이 지날수록 감사함을 느끼게 된다.
집에 들어가자마자 나를 반기던 친구는 Maggie라는 슈나우저였다. 어릴 때 다른 사람들이나 강아지들을 많이 만나지 못해 사교성이 매우 낮고 낯선 사람들에게 공격적인 이 강아지는 아니나 다를까 나를 향해 몇 분간 짖어댔다. 하지만 Maggie 이상하리만큼 빨리 나에게 경계를 풀었고, 그 날 밤 내 발치에서 잠을 잤다.
호스트 가족의 애완 동물은 강아지뿐만이 아니었다. 우선 늙은 고양이 두 마리가 있었고, 여기에 앵무새 세 마리가 같이 살고 있었다. Izzy와 Gabby라는 이상한 이름의 회색 앵무새들은 매우 컸으며, 놀랍게도 말을 할 수 있었다. 어찌되었던, 새들은 나와 전혀 친하지 않았다.내가 그들이 받던 관심과 사랑을 가져갔다고 느꼈는지는 몰라도, 항상 나를 보면 깃털을 세우고 나를 공격하려고 했다.
나와 사이가 좋든 안 좋든, 이 친구들은 내가 처음으로 사귄 동물 친구들이었다. 개와 고양이, 그리고 앵무새와 함께 생활하는 것은 참 신기한 경험이었다. 동물과 함께 생활하는 것은 일상의 공허함을 차고 넘칠 만큼 채워주었고, 그들의 존재감에 익숙해져 있던 나는 나중에 한국에 돌아와 솜이라는 강아지를 입양하기에 이르렀다.
생활 방식이 달랐던 호스트 가족과 함께 생활하는 것은 항상 쉬웠던 것은 아니다. 호스트 언니 Becca는 이제껏 청소와 빨래, 그리고 설거지를 담당했는데, 나는 Becca와 함께 집안일을 도맡아 해야 했다. 한국에서 해보지 않은 집안일을 맡아 하는 것은 결코 만만한 일이 아니었다. 특히, 나와 호스트 언니가 동아리 때문에 바빠 미처 설거지를 못해 설거지가 쌓여 있어도 호스트 엄마와 아빠는 손도 대지 않을 때,많은 스트레스를 받곤 했다. 철저하게 자신이 맡은 일은 자기가 알아서 해야 한다는 이 사람들의 사고 방식을 단적으로 느낄 수 있던 순간이었다.
힘들었지만 나는 이런 순간들을 통해 책임감과 독립심을 키울 수 있었던 것 같다. 내가 맡은 일은 내가 책임져야 한다는 것을 직접 몸으로 배우면서 나는 조금씩 성장해나갔다. 언제나 엄마가 해주던 일들이 얼마나 버겁고 고된 일인지도 이해할 수 있었는데, 엄마의 위치에 대해 새삼 생각해보게 해 줬던 시간이기도 했다.
집에서 30분 정도 스쿨버스를 타면 도착하는 학교는 Albert Gallatin Senior High School이었다. 백인들이 대다수를 차지하는 이 학교에서 동양인은 나 하나였다. 난생 처음 보는 동양인 학생에, 학교 학생들은 신기하기도 했고 또 그만큼 거부감을 가진 듯 했다. 그래서인지 학기가 시작하고 꽤 오랜 시간 동안 친한 친구를 사귀는 것이 쉽지 않았다. 다행히 내 호스트 언니 Becca의 친구들과 친해질 수 있었고, 학교에 적응하는데 어려움은 조금 덜했다.
내가 스스로 내 친구를 만들 수 있던 동기는 바로 ‘용기’가 아니었나 싶다. 아직 한국에서는 중학생인 내가 미국에서는 9학년으로 고등학교에 들어가 12학년까지의 사람들을 만나는 과정에서 나는 매우 위축되어 있었다. 진한 화장을 하고 동양인보다 더 성숙해 보이는 친구들에게 말을 거는 것이 참 힘들 때가 많았다. 수많은 어려운 사람들 속에서, 나는 아직까지 잊지 못하는 친구 Lindsey 덕분에 내 친구들을 만들 수 있었다.
여느 때와 다름없는 수업이 끝나고 다음 강의실로 이동하는 복도에서였다. 활기차고 성격이 좋아 다른 친구들에게 인기가 많았던Lindsey는 장난기가 많은 친구였다. 지금은 생각도 나지 않는 시답잖은 농담을 내게 했는데, 무슨 용기에서인지 나는 그 농담을 제대로 받아 치며 웃었다. 그 이후로 나는 급속도로 Lindsey와 친해지게 되었고, 덩달아 Lindsey의 친구들과도 어울릴 수 있었다.
어떻게 보면 내가 그 동안 힘들어하던 시간이 너무나도 허무하게 끝나버린 것 같았다. 진작에 내가 용기를 내어 이들과 친해졌더라면, 이 친구들과 더 많은 시간을 재미있게 보낼 수 있었을 테다. Lindsey는 나와 같은 동네에 살고 있다는 것을 나중에야 알았고, 그 친구 집에서Lindsey가 나를 위해 만들어준 웃긴 farewell 동영상도 보았다. 지금 생각하면 참 아쉬움이 많았던 친구 관계다. 하지만 그 덕분에 나는 내성적이고 차분하기보단 사람들에게 먼저 다가가 친해지고 싶은 성격을 가지게 되었고, 이 사교성은 지금까지 내가 사람들을 대할 때 좋은 영향으로 작용하고 있다. 미국 생활 동안 친구 관계에서 아쉬움이 남는 만큼 지금은 후회 없이 친구들을 사귀고 있다.
미국에서의 공부는 참 쉬웠던 걸로 기억한다. 수학 수업은 계산기를 쓰는 것보다 손으로 푸는 것이 훨씬 빨랐고, 이런 나를 친구들과 심지어 선생님까지 신기하게 바라보았다. 제일 기억에 남는 수업은 Biology였다. 매 수업마다 용어 정리를 해가야 했고, 매주 퀴즈를 봐야 했던 꽤 밀도 있는 수업이었다. 개인 발표에서 나는 브라우니를 구워 그 위에 세포 조직을 아이싱으로 표현해냈는데, 친구들에게 정말 인기가 좋았던 기억이 난다. 발표를 끝낸 후 다같이 브라우니를 나눠 먹으며 소소한 행복을 느꼈다.
나는 학교를 다니면서 한국에 대해 많이 알리고 싶었다. 학기 초, 내게 어디서 왔냐고 묻던 흑인 여자 아이에게 “I’m from Korea”라고 하자, 한국이 미국의 어느 주인지 물어본 그녀의 질문이 꽤나 충격적이었나 보다. North Korea인지 South Korea인지 물어보는 것은 양호한 질문이었다. 한국이 어디에 있는지, 심지어 나라인지도 모르는 사람이 존재한다는 것을 안 후부터, 나는 이들에게 한국에 대해 최대한 많이 이야기하고 알려주고 싶었다.
Public Speech라는 수업에서, 김연아와 반기문에 대해 개인 프로젝트를 한 적이 있다. 자신이 존경하는 위인에 대해 에세이를 쓰는 프로젝트가 있었는데 여기서 반기문의 유년기에 대해 이야기했고, 또 파워포인트를 이용한 자유 주제 발표에서 나는 김연아의 끈기와 노력에 대해 친구들을 대상으로 발표했다. 모두 다 신선한 내용이었기에 호평을 받았고, 학기 말 Public Speech에서 A를 받아 매우 뿌듯했던 기억이 난다.
호스트 언니 Becca를 따라 들었던 Choir 수업에서도 한국에 대해 알리고픈 나의 노력은 계속되었다. 학기말 Choir concert에서 지도 선생님의 반주에 맞춰 나는 아리랑을 한국어로 독창했다. 학교 대강당에서 아름다운 피아노 선율에 맞추어 조용히 아리랑을 부르던 동양인을 사람들은 신기하게 봤으리라.
미국에서 지내면서 나의 삶에 아주 큰 부분을 차지했던 활동은 호스트 언니를 따라 들어간 Drama Club이다. 여기서 나는 난생 처음으로 오디션을 보고, 뮤지컬의 아주 작은 배역을 맡게 되었다. Dr.Seuss의 여러 책들을 이어 붙인 뮤지컬 Seussical을 준비하던 시간은 내 생에 가장 빛나던 순간들 중에 하나이다. Ensemble이지만 주연 배우들 못지않게 많은 준비를 했고, 많은 사람들이 모여 다 함께 하나가 되어 엄청난 결과물을 만드는 그 희열은 어디에도 견줄 수 없을 만큼 짜릿했다. 무에서 유를 창조해내는 과정은 매우 힘들었다. 특히 5,60명이 되는 거대한 규모의 공연을 이끌어나가기 위해선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했다.
공연을 위한 기금을 모으기 위해 Drama club 멤버들은 페퍼로니 롤 (아주 맛있다!)을 학교 및 이웃들에게 팔았고, 여기서 모인 기금을 통해 공연 자금 을 마련했다. 공연 몇 주 전에는 모두 다 Hell Week라고 하는 집중 연습 기간에 들어갔다. 수업이 마치는 2시부터 밤 10시까지 공연 연습을 하고 피드백을 받는 기간이었는데, 안무가를 초청해 강도 높은 안무 연습을 받는 등 모두의 신경이 공연에 쏠려 있는 시간이었다. 저녁도 제대로 먹지 못하고 연습할 때가 많았지만, 난생 처음으로 무언가에 흠뻑 빠져볼 수 있는 시간이었다.
미국에서의 생활을 묘사하기란 끝이 없다. 하지만 이 모든 경험을 하나로 요약하자면, 미국에 있던 시간은 내가 정신적으로 가장 많이 성장할 수 있는 시간이었고, 짧다면 짧은 스물 하나의 생애에서 가장 죄책감 없이 행복할 수 있던 순간이 아니었나 싶다. 내성적이고 차분한 누에고치에서 나와 화려하게 꽃을 피워낼 수 있던, 내 일생 일대의 첫 번째 터닝포인트가 미국에서의 소중한 순간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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