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교환학생]
인생의 전환점이 되었던 미국 교환학생
다가오는 기회를 놓치지 않는 법을 배우다(2)
미국교환학생 컨설턴트 이은수
2009년도 미국교환학생 김희래
미국에서의 생활을 마치고 한국에 온 나는 휴학계를 냈던 중학교에 복학하게 되었다. 언니로서 친구들과 함께 고등학교 입시를 치렀고, 그 결과 울산외국어고등학교 영어과에 진학하게 되었다.
외고 생활은 생각처럼 순탄하지는 않았다. 학교에 대한 기대는 현실과의 괴리로 너무나 일찍 깨지게 되었고, 보수적이고 규율을 중시하는 학교 및 기숙사의 분위기는 나와는 맞지 않았다. 어릴 때의 치기인지, 나의 자존심을 지키려는 발악이었는지 잘 모르겠지만, 나와는 맞지 않는 공기와 나는 참 많이도 싸웠다.
그러는 동안에도 학교에선 참 열심이던 나였다. 1학년 2학기 때 성적이 올라 전교 내신 상위권에 도달했고, 덩달아 모의고사 점수도 웬만큼 나와주었다. 교내 활동에 참 열심히 임하기도 했다. 2학년 때 반장 활동과 더불어 교내 합창부 부장도 함께 역임했고, 교내 또래 교사 프로그램에 참여해 또래 교사로서 친구들의 수학 공부를 도와주기도 했다. 2학년 때가 내 고등학교 시절 중에서 가장 힘들고 바쁜 시간이었으리라. 지금 생각하면 그 모든 일을 어떻게 다 해냈는지 모르겠다. 3학년에 들어서 이상하리만큼 여유로웠던 이유가 2학년 때 미리 너무 열심히 성취했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우리 학교에서 교외 활동을 가장 많이 한 사람을 꼽으라 하면 자신 있게 나라고 손을 들 수 있을 것이다. 어학 방면에서 내 나름대로 노력을 많이 했던 것 같다. 영어 경시대회에 나가 수상을 하고, 공인 성적도 취득하는데 힘썼다. 2학년 초에 ibt TOEFL 117점을 취득하고도 부족하다 느껴, 3학년이 되어 다시 토플 공부를 시작해 119점을 취득할 수 있었다. 고등학교에 들어와 제 2외국어로 처음 배우게 된 중국어도 짬짬이 공부해 높진 않지만 新HSK 4급을 취득해, 부 전공언어에 대한 관심도 보여줄 수 있는 기회가 되었던 것 같다.
모의 유엔 활동은 내 고등학교 시절을 가득 채워준 소중한 경험이다. 고등학교 1학년 겨울 방학에 동아리 선배의 소개로 알게 된 모의유엔에 나가겠다는 결심을 했다. 겁도 없이 아무것도 모른 채로 혼자 서울로 올라가 첫 모의유엔 대회에 참가하여 많은 자극을 받았던 기억이 난다. 나름 울산에서 영어를 잘한다고 생각했지만, 서울에서 만난 친구들은 확실히 다르다는 것을 느끼고, 그들과 동등한 위치에서 어깨를 나란히 맞대겠다는 결심을 하게 되었다. 2학년 때 학교 친구 두 명과 함께 3인 1조로 나간 Youth Model Summit에서 금상을 수상하면서, “간절히 구하면 이루어진다”는 말을 뼈저리게 느꼈다. 모의유엔에서의 활동에 탄력을 받아, 그 해 여름방학에 한국외대와 중앙일보가 동시 주최하는 Korea International Model Congress 2012에서 한국외대 총장상이라는 대상을 받는 영광을 얻었다.
2학년 2학기에는 고려대학교 모의유엔 의장직에 지원해 10주간의 의장 교육을 받으러 주말마다 서울에 다녀오는 엄청난 리스크도 감행했다. 주말 당일치기로 다녀오는데 들어간 노력과 시간이 엄청났지만, 그때의 나는 내가 가진 지역적 장벽을 뛰어넘고 원하는 것을 하고 싶었다. 생각해보면 엄청난 오기였던 것 같다. 결국 너무나 많은 것을 희생해야 했고, 공부 슬럼프도 겹쳐 성적이 하락세였던 시기였다. 하지만 잃은 만큼 얻은 것도 참 많았던 경험이었다. 멋진 사람들을 만났고, 그들이 가진 비전과 포부를 함께 공유할 수 있었다. 친구들과 선배들을 통해 미래에 대한 동기 부여와 자극을 받은 소중한 시간이었으며, 50명이 넘는 인원이 참석하는 대규모 회의를 내가 이끌어 나가고 방향을 잡는 데서 성취감과 자신감도 얻을 수 있었다.
나의 모의유엔 활동은 대회라는 점들이 이어져 결국 학생 논문의 형태인 하나의 선으로 완성되었다. 단순히 모의유엔 대회에 수 차례 참가하는 여타 다른 학생들과는 달리, 나는 모의유엔에 참여하면서 직접 느꼈던 한계와 이에 대한 해결 방안에 대해 연구하고 싶었다. 지방 학생으로서 모의유엔 활동을 하며 느꼈던 정보 접근의 폐쇄성과 지역에 따른 한계를 파헤치고, 이를 어떻게 해소할 수 있을 지에 대해 글을 쓰기 시작했다. 한국교육개발원이 주최하는 국제 청소년 학술대회(International Conference for Youth, ICY) 본선에 진출하여 논문 발표를 하고 우수청소년학자상을 수상하였다. ICY와 같이 수준 높은 대회에서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었던 비결은 꾸준히 관심을 가지고 활동한 분야에서 일관성 있는 스토리를 만들어 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다른 학생들이라면 느끼지 못했을 지방 학생들의 모의유엔 활동에서의 어려움을 잘 반영하여 실상을 파헤치고, 이에 적절한 해결 방안을 도출해낸 스토리를 교수님들이 높이 사신것 같다.
내 고등학교 시절 빼놓을 수 없는 마지막 요소는 바로 합창 활동이다. 2학년이 되어 울산외고 합창부 Harmony의 부장이 된 나는3학년 선배들이 입시 준비에 바빠 활동을 할 수 없게 되자 60명이라는 많은 수의 신입 부원들을 충원해야 했다. 점심, 저녁시간을 이용하여 작년 활동 영상을 국제 회의실에서 보여주고, 쉬는 시간마다 홍보 포스터를 붙이면서 어렵게 부원을 모을 수 있었다. 하지만 이후 연습을 시작하였을 때, 나는 또 다른 난관을 마주해야 했다. 활동 시간이 따로 배정되지 않은 비공식 동아리의 부원들은 자발적으로 점심시간을 이용하여 연습을 해야 했지만, 하나 둘 핑계를 대며 연습에 빠지게 되자 정상적인 합창 연습이 어려워졌기 때문이다. 고민 끝에, 나는 모두가 모인 자리에서합창부의 존재 이유에 대해 진솔한 대화를 나눠보았다. 개인의 바쁜 일정을 이해는 하나 연습량과 합창 수준에 대해 엄격해져야 하는 부장의 입장을 설명하며, 부원들과 함께 지역에 봉사하는 마음을 모아 설립한 합창부를 온전히 지켜나가자는 약속을 했다. 동기를 부여 받은 부원들은 파트 별 연습 일정을 만들어 단체 연습 시간은 줄이되 연습 강도를 높이자는 의견을 내놓았으며, 합창부 연습 시 파트장의 권한을 더욱 강화하는 시스템을 마련하였고 음정을 잘 찾지 못하는 학생들을 데리고 저녁 시간을 이용하여 추가적으로 연습을 했다.
연습에 박차를 가한 결과, 합창부는 장애아동 봉사 공연에서 호평을 받았고, 학교폭력 힐링 콘서트에 초청받아 기립 박수를 받기도 했다. 마지막으로 광역시 중고교생 합창대회에서 1위라는 영광을 얻었을 때, 나는 협동의 참된 기쁨과 함께 리더의 역할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볼 수 있었다. 나 또한 빠지지 않고 연습에 참여하는 것이 부담스러웠지만, 솔선수범하는 리더의 책임감과 의무를 몸소 실천하는 계기가 되었다. 또, 집단에서의 동기 부여의 중요성을 다시 한 번 알게 되었고, 여기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집단의 목적을 성취하기 위해서는 구체적인 실행 방안이 마련되어야 한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나의 대학 입시 준비는 비교적 일찍 시작되었다. 모의유엔 활동을 하기 시작하면서 같이 토플 공부를 시작했는데, 생각보다 너무 일찍 ibt TOEFL 117점이라는 고득점이 나온 덕분일 것이다. 그때부터 자연스럽게 어학특기자 전형을 생각하게 되었고, 대외활동과 내신에 집중할 수 있었다. 대입 준비에서 가장 중요하다 생각하는 것은 자신의 현 위치 및 장단점을 파악하고, 거기에 맞는 지원 가능 학교를 파악하는 것이다. 비록 모의고사 성적이 좋았지만, 이보다 내신과 어학 성적 및 수상 실적을 종합하여 평가했을 때 나는 더욱 경쟁력이 있다는 것을 깨닫고 과감하게 수시에 전념한 케이스이다. 그래서 수시 최저등급이 없는 전형을 선택하게 되었고, 여기다 내가 지망하는 국제학부의 특성이 잘 어우러져 어렵지 않은 전형 선택을 할 수 있었다.
나는 서울대 일반 수시, 연세대 특기자, 고려대 국제인재, 성균관대 성균 인재 및 특기자,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화여대 특기자 전형을 지원하였다. 애초에 재수할 마음도 수능을 칠 마음도 없었기 때문에, 수시 마지노선을 안전한 이화여대로 정했다. 가장 영어 특기자라고 할 수 있는 에세이 전형은 지원 자체를 하지 않았다. 서강대나 한국외대의 경우 내가 가지고 있는 장점보다는 순전히 에세이 실력으로 평가를 하기 때문에 굳이 지원하여 수시 카드를 버리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3학년이 되어 바빠지는 다른 친구들과는 달리, 나는 오히려 3학년이 되어 이상하리만큼 여유로워졌다. 수시 내신이 반영되는 3학년 1학기 내신을 최대한 향상하는데 성공한 후,바로 본격적으로 자기소개서 작성에 들어갔다. 약 서너 달에 걸쳐서 몇 십 번을 수정하고, 피드백을 받고, 다시 수정하는 반복적인 작업이었다. 그 동안 짬짬이 뉴스와 책을 통해 시사 상식을 습득하고, 이를 토대로 면접 준비를 했다. 2학기에는 주말마다 서울에 있는 학원에 등록해 면접 및 에세이 연습을 하고 내려오기도 했다. 증빙 서류까지 다 작성한 후, 나의 모든 것을 건 입시 지원 봉투를 제출할 때의 허탈하고도 뿌듯한 기분은 아직까지 잊혀지지 않는다.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이 끝나고, 가장 먼저 1차 합격생을 발표하는 연세대 소식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 날은 학교에서 모의고사를 치고 난 후에야 결과를 확인할 수 있었기 때문에 스트레스도 정말 많이 받았던 기억이 난다. 수능 공부하는 친구들을 위해 혼자 화장실에서 핸드폰으로 연세대 홈페이지에 들어가 떨리는 마음으로 수험 번호를 쳤다. 우선선발이었다. 그때의 그 기분은 아직까지 말로 형용할 수 없을 테다. 면접을 보지 않고도 내가 연세대학교 학생이 되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떨리는 마음으로 엄마 아빠께 전화를 드리고, 가만히 책상에 앉아 친구들이 건네는 축하의 말을 멍하게 받았던 것 같다. 이후 이화여대 1차 합격을 했지만, 이미 연세대학교에 합격한 상태라 면접에 참석하지 않았다. 내가 유일하게 면접을 간 학교는 고려대학교였다. 면접도 좋은 경험이라 생각하고 마음 편하게 에세이를 써내고 면접을 봤고, 그 결과는 최초합격이었다. 이어서 서류 100%로 선발하는 성균관대학교에서도 합격 소식을 전달받았고, 나는 행복한 고민에 빠지기 시작했다.
고려대학교와 연세대학교 사이의 고민은 등록 직전까지 계속되었다. 하루는 부모님께 고려대에 진학하겠다고 말해놓고, 그 다음날 일어나 연세대에 가야 할 것 같다고 말을 하곤 했다. 둘 다 너무나 상이한 매력을 가진 학교고 학과였기에 결정은 더욱 힘들었다. 결국 나는 연세대학교 테크노아트학부에 등록을 마쳤다. 작은 학부인 고려대학교 국제학부에 비해, 연세대학교 테크노아트학부는 국제대학인 Underwood International College 소속이었기 때문에 훨씬 폭넓은 교육을 기대할 수 있었고, 우수한 프로그램을 제공받을 수 있다고 느꼈다. 신설학과인 테크노아트학부는 이제 막 시작하는 학과이기 때문에 재학생들의 제안과 활동이 유연하게 받아들여질 기회와 제공되는 혜택이 많을 것이라고 말씀해주신 분도 있었다. 그분은 동문 네트워크는 대학원에서야 강력해지기 때문에 학부 때는 크게 작용하지 않는다고 보시며, 본인의 성향을 감안하여 도전적인 환경에서 더 잘하는지, 아니면 안정적인 상황에서 보다 탁월해지는지 생각해보라고 조언해주셨다. 어떤 전공이 중요하다기 보다, 어떤 도전과 한계에 부딪히느냐가 중요하다는 점에서 학사 전공이 테크노아트이든 국제학부이든 차이는 없다고 말씀하셨는데, 여기서 정말 많은 공감을 했던 기억이 난다.
대학에 진학한 후, 중학생 때부터 겪었던 일들을 이렇게 수기로 쓰면서 많은 생각과 자기 반성을 하게 된다. 오히려 지금의 내가 안일하게 현실에 상주해 있지는 않나, 목표 없이 떠돌아다니고 있지는 않나 생각하게 되며 어릴 적 나의 열성을 되찾아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현실과 이상의 괴리에 빠져, 내가 한동안 근시안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있었다는 것을 새삼 느낀다. 홀로 미국으로 발을 내디딜 때 ‘더 넓은 시야로 세상을 바라볼 수 있는 안목을 키우자’라고 결심했던 그때의 나를 되찾아야지. 지금 내가 흘려 보내고 있을지도 모를 순간 순간을 터닝 포인트로 생각하고 소중히 다가오는 기회를 잡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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